전주 1박 2일 여행 코스 경기전 알아보기 (Feat. 조선태조어진)

전주 1박 2일 여행 코스 경기전 관련 대한 포스팅입니다.
경기전은 전주 한옥마을과 함께 꼭 방문해야 할 명소 중 하나입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경기전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공부한 내용을 공유해 보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여러 지식백과를 참고하여 요약한 것이니,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전주 경기전 이란?

전주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봉안하기 위해 세워진 전각으로,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1410년(태종 10년)에 건립된 경기전은 태조의 공덕을 기리고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장소로, 전주 지역의 중심적인 역사적 건축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재 전주 한옥마을 내에 위치해 있으며, 대한민국의 사적 제33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전주 경기전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건축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정전(正殿):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중심 전각.
  • 조경묘(肇慶廟): 태조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
  • 외삼문과 내삼문: 경기전의 정문과 내부 구역을 나누는 문들로, 각각 외부와 내부를 구분.
  • 홍살문: 대한민국의 전통 대문(大門)으로, 설치한 지역이 신성한 곳이거나 구격(具格, 주 격식이나 예절을 갖춤)이 맞는 장소임을 나타내기 위해 표지로 세우던 문이다. 일반 문과 달리 문짝이 없고 ‘문 문(門)’자 모습을 하였다. 이름을 직역하면 ‘붉은 화살 문’ 인데, 붉은색으로 칠함은 동짓날 팥과 같이 붉은색이 양기를 띄어 귀신과 액운을 물리친다는 뜻이고, 윗부분을 화살로 장식함은 잡귀를 화살로 쏘아 없애버린다는 뜻을 담는다. 기록상 삼국시대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며, 현재 남아있는 홍살문들보다 과거의 홍살문들은 그 크기가 매우 컸다. 

이외에도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있으며, 이들 건축물은 조선 시대의 전통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어용전 이란?

어용전(御容殿)은 왕의 어진을 모시기 위해 특별히 건립된 전각입니다. 태종은 1410년(태종 10년)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각 지역에 어용전을 건립하였고, 이후 세종은 어용전들의 이름을 각각 다르게 명명하였습니다.

  • 전주 경기전(慶基殿): 전주에 위치한 어용전으로, ‘경기(慶基)’는 나라의 근본을 경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경주 집경전(集慶殿): 경주에 위치한 어용전으로, ‘집경(集慶)’은 여러 가지 경사를 모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평양 영종전(永終殿): 평양에 위치한 어용전으로, ‘영종(永終)’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세 곳의 어용전은 각 지역에서 조선 왕조의 정통성과 왕권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주 경기전 어진의 행방

《태종실록》에 따르면 경기전에 어진을 봉안한 것은 1410년(태종 10) 무렵이다. 임진왜란 때 정읍 내장산을 거쳐 아산 등지로 피난시켰다가 1597년(선조 30)에는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에 안치하기도 했다. 1614년(광해군 6)에 경기전이 중건되자 묘향산에서 전주로 이관해 봉안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으로 옮겼으며, 1767년(영조 43) 정해대화재 때는 전주향교 명륜당에 피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872년(고종 9) 어진이 너무 낡아 조중묵(趙重默)이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려 봉안하였다.

경주 집경전 어진의 행방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 임금의 얼굴을 그린 것)을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건물이 훼손되어 어진만 따로 강릉으로 옮겼으나 1631년(인조 9)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경주시 북부동에 있는 집경전 터의 남쪽에 1798년(정조 22)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라는 어필이 적힌 비석과 비각이 건립되었는데 그후 화재로 인해 비각은 소실되고 현재는 비석만 남아 있다.
* 구기라 함은 ‘옛터’라는 뜻이다. 즉, 지금은 없다라는 의미이다.

평양 영종전 어진의 행방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1398년 평양 영종전에 봉안되어 조선 왕조의 상징적 유물로 보존되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안전하게 보존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관리 소홀과 문화재 약탈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한국 전쟁 (1950년 – 1953년) 중 평양 영종전이 파괴되면서 어진은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고, 1953년 이후로 그 존재나 보존 상태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태조의 업적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습니다.

  • 1388: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아 고려 말 혼란스러운 정국을 평정하였습니다.
  • 1392: 조선을 건국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습니다.
  • 1394: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건립하여 새로운 왕조의 중심지를 마련하였습니다.
  • 1398: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태조는 왕위를 둘째 아들 정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습니다.
  • 1408: 태조 이성계는 함흥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죽음은 조선 초기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태조는 조선의 국경을 안정시키고, 군사적,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유교를 중심으로 한 통치 이념을 확립하였습니다.

태조와 태종의 관계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관계는 조선 초기의 권력 다툼과 정치적 변화를 반영하는 복잡하고 긴장된 부자 관계였습니다

  • 1398: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태종 이방원이 이복 형제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때 죽은 형제로는 이방석과 이방번이 있습니다.
  • 1399: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양위하고, 한양을 떠나 함흥으로 은거하였습니다.
  • 1400: 태종 이방원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고 즉위하였습니다.
  • 1408: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죽음 이후에도 태조와 태종 사이의 불화는 조선 초기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와 같이, 태조와 태종의 관계는 조선 왕조 초기의 권력 구조와 정치적 긴장의 핵심을 이루며, 이들의 갈등은 왕권 강화와 조선의 정치적 안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태종은 어용전을 왜 만들었을까?

태종 이방원과 태조 이성계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요 원인은 권력과 계승 문제에서 비롯된 갈등입니다. 태종은 태조의 정실 부인인 신의왕후의 아들로, 태조가 조선을 세운 후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그는 왕위 계승 문제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태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권력 투쟁과 가족 간의 갈등을 겪었고, 이는 태조와의 관계를 악화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이해하면, 태종이 태조의 초상화를 보관하기 위한 어용전을 만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정통성 강화: 태종은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태조의 어진을 포함한 왕실의 상징적 요소들을 중요시했습니다. 태조는 조선 왕조의 창립자이자 중요한 상징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어진을 보관하는 것은 왕조의 정통성과 권위를 드러내는 방법이었습니다.
  2. 왕실의 존경과 의무: 태종은 비록 태조와 개인적으로 갈등이 있었지만, 왕실의 일원으로서 태조를 존경하고 그의 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왕실의 의무로 여겼을 것입니다. 왕의 초상화는 왕권의 상징이자 역사적 유산으로서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3. 정치적 안정: 태종은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추구했습니다. 어용전과 같은 왕실의 전통적인 요소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은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태종의 태조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어용전의 설립은 조선 왕조의 정통성과 역사적 유산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